2011년 3월 29일 화요일

점심

처음에 문득
그냥 싫다 싫다 했는데

싫다는거에 집착하다보니
이제 막 우울하기까지 하다...

사실 그렇다고 같이 점심 먹고싶은 그런 사람도 딱히 없는디;;;
왜 요샌 이렇게 혼자 먹는 점심이 싫을까나...
게다가 몇년을 이렇게 먹어도 아무 감정이 없었단 말이지...


그래 뭐 원래 사람이 그냥 좋다 좋다 하면
마음 속으로 점점 더 좋아지는 법이고
반대로 또 싫다 싫다 하면
점점 더 싫어지는 법이긴 한데...

그런 의미에서
진짜 '외로움'이란 구멍은
절대 쳐다도 보면 안 되는 곳인 것 같다...

부작용이 너무 심해;;;


워워워...

사는거 말이지

ㅋㅋㅋ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쉽고...

힘들다면 힘들고
재밌다면 재밌고...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거 아니라면
또 별거 아니고...

ㅋㅋㅋ

그르네...

2011년 3월 27일 일요일

알러지 있지만 상관없다...



이런거 한 마리 키우고 싶다;;;
느아아아라갈아갈알ㅇㄱㄹ악ㅇ강ㄱㄹㅇㄱㄹ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가끔

그냥 조용한 곳에서 노래나 부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ㅋㅋㅋ
생각보다 괜찮은 장소가 없어...

서울은, 신촌은 때론 나한테 너무 번잡해 ㅋㅋㅋ

2011년 3월 23일 수요일

타인

남을 이해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

이 두리뭉실한 행위에 물론 교집합도 있겠지만,
대칭차집합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쉬울 듯...


남을 이해하지만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
혹은 남을 존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글쎄, 사람 성격마다 다 다르겠지마는

나는 존중이 선행되어야된다고 본다.
존중이 선행되고 나서야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지
아니고서는 그냥 '간파'일 뿐이다.

오히려 간파는 간접적으로 존중을 저해하는 성향까지 보이는 듯 하다.

2011년 3월 15일 화요일

인류 시작 이래,

'신'이란 단어는 얼마나 동시대에 다채롭게 쓰였고
또 시간에 따라 얼마나 더 다양하게 변해왔을까.

더 거슬러가서
처음 그 단어가 탄생했을 때,
어떤 의도로, 무엇을 정의하기 위해 약속되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이 특정 종교를 가지거나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신을 섬기는 것은
'규격화된 사회압'과 '특유의 성격'이 조화된 함수적 발현이라고 보인다.

엊그제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무신론자는 그냥 '내 위에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하는거라고.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지만, 이렇게 공격적이고 단정적인 주장은 아니었음)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지만, 뭐 보편적인 현상 수준에서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지배적인 비율로,
유신론자들은 '신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은게 아닐까.
'신의 선'을 '자신의 선'으로 기반삼아 재구성하고,
다시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안도감...



나는,
나의 무신론은 그렇지 않아~ 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소심하게,
'신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없어. 인간한테 신기할 뿐이지.'라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반항을 할 뿐.



모르니까, 그게 또 내가 모르는,
아니면 내가 알아채기 싫은 내 내면의 진심일지도.

신이라...
그래, 솔직히
난 정말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 다시보기 운동...

...이 진행된지 근 10년...

요는
플라톤의 시각에서 재해석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배제하고
원래 그가 전하고자했던 메세지의 원본에 다가가보자는건데...

확실히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남긴 저서가 없고
플라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전승이 되었으며
또한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종종 스승의 이름을 빌어 표현했으니...

그래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죽였다라고 종종 말한다.


플라톤에 의해 '닫힌 결말'이 되어버린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란
다시 한 번 '열어볼'가치가 충분히 있다.
가치가 있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뚜껑을 열어봐야
소크라테스에 이어 플라톤까지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역설할 뿐
어떠한 '주류 해석'이 권력을 획득하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또 하나의 '닫힌 결론'이란
소크라테스를 살린다기보다 '살려놓고 두 번 죽이는'게 된다.



이미 플라톤이 그 존재를 재구성한 시점에서
객관적인 소크라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기독교인들의 신과 같이,
또는 불제자들의 석가모니와 같이,

누구나가 '자신이 원하는', '그리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크라테스를 재창조 할 뿐이다.


소크라테스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대상과 나의 교집합이 약간 넓어진 것 뿐이다.

그 부분집합으로 상대를 알았다는 것은 고백하는 순간 오만이겠지.

특별히 철학에 관해서는 항상 모든게 '열린 결말'이 되어있어야 한다.
결론을 내기위해 사고를 시작하는 순간 죽은학문, 혹은 오만이 되겠지.

악어의 눈물.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관해 가장 모른다.

뚜껑을 열되, 닫으려 하진 마라.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011년 3월 7일 월요일

변화량

문득 든 생각이지만,
인간의 감각기관은
어떤 자극의 총 량보다는
순간적인 자극의 '변화량'에 더 민감한 것 같다.

매일 보이던 무엇이 사라지면 뭔지는 몰라도 느껴지고
지하철을 타도 몸은 속도 보다는 가속도를 느끼게 마련이다.
(속도는 느낀다기보다 추측하고 사유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생물학적으로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다.
항상 있는 자극이라면 그 상태에서 생존이 불가능하진 않다는 의미고,
무언가 변화가 있다면 안정성에 하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겠지.


마음도 감각과 비슷한 원리로 움직이는 듯 하다.

2011년 3월 6일 일요일

커피를 쏟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쏟은 커피를 바라보았다...


컵에 담긴 물은 컵에 담긴 물,
쏟은 물은 쏟은 물,
주워 담은 물은 주워 담은 물...

주워담은 물은
처음에 담긴 물과는 다르겠지
절대로


이미 쏟은 시점에서
전과 같을 수는 없는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