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확실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타입이지.
지금도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즐거운 기억에 유영하는걸 좋아하고...
나에게 고딩시절 그 친구들과 지내던 시간은 정말 너무 소중하지.
그렇지만 말이야...
내가 50 60을 넘어 흰머리가 많아지고나면
아마 제일 그리워할 시간은
바로 지금과 몇년 전이 아닐까?
너랑같이 삶의 문제와 형이상학, 진리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같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놀고 즐기고...
뭐가뭔지 몰라서 소중할 수 있었던 그 때의 순수함과는 좀 다르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 나누는 공감과 이야기들은 참 내가 그리워했던 과거중 하나이다.
But, everything changes...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변하지만
사람들은 영원을 바라곤하지.
변하지 말자는 부질없는 맹세는 안하는 대신에,
아름답게 기억하자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꺼야.
뭐, 굳이 이렇게 간지럽게 표현 안 해도 그렇게 되겠지만.
궁금하지 않냐? ㅋㅋㅋ
40년 후 우린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적지않게 쪽팔리고 부끄럽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을꺼라고 본다.
앞으로 같이 멋있게 늙어가자고 친구 ㅋㅋㅋ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그럴지도 몰라(1)
내가 글이 길어지는 이유는 많지 않아.
핑계를 대기 때문이랄까?
일단은 나한테... 하는 핑계가 젤 많겠고
요즘들어 그런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서
나를 들들볶는 너한테 하는 핑계도 늘었고
원래 내 글은 간결하고 직관적인데 말이야.
사실, 진짜 맞는말은 그리 길지 않아.
핑계를 대기 때문이랄까?
일단은 나한테... 하는 핑계가 젤 많겠고
요즘들어 그런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서
나를 들들볶는 너한테 하는 핑계도 늘었고
원래 내 글은 간결하고 직관적인데 말이야.
사실, 진짜 맞는말은 그리 길지 않아.
2010년 8월 28일 토요일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2010년 8월 19일 목요일
슬픈 남자의 이야기...
살이 찌면 더위를 많이 탄다.
과학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있었다.
요즘 살이 쪘다.
고로 덥다.
역시 과학적이다.
......
어쩌라고?
니런 @#%^#@%$...
땀 계속 나고 이 뭐 !#^#^!#$!$!@%$
똑같은 길인데 왜 이렇게 멀고 ^!$^#%^&$
사람이 꼭 '이해'한다고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던가.
역시...
모든 일은, 특히 '고통'에 관한 일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국 '모르는'것일 뿐이다...
옌장...
과학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있었다.
요즘 살이 쪘다.
고로 덥다.
역시 과학적이다.
......
어쩌라고?
니런 @#%^#@%$...
땀 계속 나고 이 뭐 !#^#^!#$!$!@%$
똑같은 길인데 왜 이렇게 멀고 ^!$^#%^&$
사람이 꼭 '이해'한다고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던가.
역시...
모든 일은, 특히 '고통'에 관한 일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국 '모르는'것일 뿐이다...
옌장...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불가항력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가져다 줘도
자기가 배부르다고 안 먹는다면 어쩔 수 없고
마음과 우주가 서로 어떻게 주고받고 움직이는지 원리를 설명해줘도
안 믿으면 그만이라
어쩔 수 없이 우주에는 주인과 객이 생기니
땅을 믿는 농부의 마음으로 믿고 정성을 다하는 자는
곧 우주의 주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자는 객일지니
우주는 믿는자의 것이오
곧 믿으면 장땡이라...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더럽다...
문득 내방이 무척 더럽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럽다. 깨끗하다. 더럽지 않다. Dirty...
사실 Dirt라는 개념 자체가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사바나의 초원이나 브라질의 숲에 '먼지'란 개념이 통할까?
차라리 모래바람이나 풍진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없으면 '집'이나 '먼지'란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먼지.
언제부터 인간은 '먼지'를 주변 사물과 구분하여 정의짓고
언제부터 인간은 '더럽다'란 개념에 부정적인 마인드를 더하고
언제부터 인간은 '먼지'란 개념에 '더럽다'라는 속성을 불어넣고
언제부터 인간은 '마음'에도까지 '더럽다'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하였을까.
'더럽다'는 개념도 인위적이고
'먼지'란 표현 자체를 부정하고
그로 인한 여러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결벽증'이란 현상 자체도 없었고 단어도 없었을테고...
그럼 그 결벽증이란 '허구' 및 '인위'로 인해 받는 고통은
'자존심'만큼이나 쓸데 없는 것일지도?
결국 나는
청소의 귀찮음을 먼지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승화시키고
'허구적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의 회귀'에 한발짝 내딧는 길을 마음편히도 택하는구나.
거참 더럽게 편한 귀결이로세...
더럽다. 깨끗하다. 더럽지 않다. Dirty...
사실 Dirt라는 개념 자체가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사바나의 초원이나 브라질의 숲에 '먼지'란 개념이 통할까?
차라리 모래바람이나 풍진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없으면 '집'이나 '먼지'란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먼지.
언제부터 인간은 '먼지'를 주변 사물과 구분하여 정의짓고
언제부터 인간은 '더럽다'란 개념에 부정적인 마인드를 더하고
언제부터 인간은 '먼지'란 개념에 '더럽다'라는 속성을 불어넣고
언제부터 인간은 '마음'에도까지 '더럽다'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하였을까.
'더럽다'는 개념도 인위적이고
'먼지'란 표현 자체를 부정하고
그로 인한 여러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결벽증'이란 현상 자체도 없었고 단어도 없었을테고...
그럼 그 결벽증이란 '허구' 및 '인위'로 인해 받는 고통은
'자존심'만큼이나 쓸데 없는 것일지도?
결국 나는
청소의 귀찮음을 먼지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승화시키고
'허구적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의 회귀'에 한발짝 내딧는 길을 마음편히도 택하는구나.
거참 더럽게 편한 귀결이로세...
2010년 8월 6일 금요일
Problem & Solution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다.
P1) 한사람이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경우
S1) 우연이다. 별 문제가 아니다.
P2) 한사람이 돌부리에 64번 걸려 넘어진 경우
S2) 사람의 문제다. 안경을 착용하자.
P3) 한 돌부리에 316사람이 넘어진 경우
S3) 돌부리의 문제다. 동사무소에 신고하거나 스스로 치우자.
P4) 모든 사람이 지배적인 확률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경우
S4) 돌부리는 특별 관리대상이다. 한군데 모아놓고 제도적으로 통제하자.
P1) 한사람이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경우
S1) 우연이다. 별 문제가 아니다.
P2) 한사람이 돌부리에 64번 걸려 넘어진 경우
S2) 사람의 문제다. 안경을 착용하자.
P3) 한 돌부리에 316사람이 넘어진 경우
S3) 돌부리의 문제다. 동사무소에 신고하거나 스스로 치우자.
P4) 모든 사람이 지배적인 확률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경우
S4) 돌부리는 특별 관리대상이다. 한군데 모아놓고 제도적으로 통제하자.
2010년 8월 4일 수요일
My Voice
어제 정리해 본
내 곡, 혹은 노래목소리의 특징.
1. 속 없이 화려하다.
2. 가슴이 울리지 않고 머리를 많이 쓴다.
3. 애써 마음을 움직이려 기교를 넣지만 감동은 없다.
4.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와 반대의 발성을 쓰고 있어 부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오래되어 문득 자연스러워 보인다.
ㅋㅋㅋ
이래가지고 음악 하겠나 ㅋㅋㅋ
고쳐야할게 한 두가지가 아니군! ㅋㅋㅋ
내 곡, 혹은 노래목소리의 특징.
1. 속 없이 화려하다.
2. 가슴이 울리지 않고 머리를 많이 쓴다.
3. 애써 마음을 움직이려 기교를 넣지만 감동은 없다.
4.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와 반대의 발성을 쓰고 있어 부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오래되어 문득 자연스러워 보인다.
ㅋㅋㅋ
이래가지고 음악 하겠나 ㅋㅋㅋ
고쳐야할게 한 두가지가 아니군! ㅋㅋㅋ
2010년 8월 3일 화요일
친구에게 고하는 글.
친구야.
내 꿈을 내 가족보다 잘 아는 친구야.
너는 내게 친구기에 해줄 말을 하고 있구나.
너의 말은 내 내면에 조금 더 가깝고
내가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을 대면하게 한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좀 다르단다.
너는 내가 강했기에 친구가 되었다고 했지만
내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사이가 달라지지 않는
조건이 없는 친구가 되어다오.
내가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와서 손잡이를 다시 잡은 건
세상에 무뎌지고 불의에 항거할 힘을 잃어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아서였고,
또 내 희생이 의미가 있을만큼 지켜야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이해하지?
바쁘더라도, 내가 부르면 튀어나와서 맥주 마시는거다.
그리고, 인간계에 적응한 카스티엘처럼
어설픈 거짓말 몇 마디 던져주라.
정 슬프면 집에가서 혼자 울든가 하고.
ㅋㅋㅋ
내 꿈을 내 가족보다 잘 아는 친구야.
너는 내게 친구기에 해줄 말을 하고 있구나.
너의 말은 내 내면에 조금 더 가깝고
내가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을 대면하게 한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좀 다르단다.
너는 내가 강했기에 친구가 되었다고 했지만
내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사이가 달라지지 않는
조건이 없는 친구가 되어다오.
내가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와서 손잡이를 다시 잡은 건
세상에 무뎌지고 불의에 항거할 힘을 잃어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아서였고,
또 내 희생이 의미가 있을만큼 지켜야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이해하지?
바쁘더라도, 내가 부르면 튀어나와서 맥주 마시는거다.
그리고, 인간계에 적응한 카스티엘처럼
어설픈 거짓말 몇 마디 던져주라.
정 슬프면 집에가서 혼자 울든가 하고.
ㅋㅋㅋ
사고 #3
My Story...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이란 사회에서
나는 선천적으로
꽤나 서양식 사고방식을 타고났다.
일단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영어를 '이해'했으며
기하학과 물리에 강하고
내 주변과의 접점에서 느껴지는 사회적 스트레스에 매우 약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들어가는 우리 집에서는
내가 기형아에 가까울 정도로 반집단적인 사고를 보이고
모든 기대에 부단히 부응해가는 모범생 형에 비해서 항상 이슈화된 문제아였다.
외압에 민감한 사람은 항상 눈치를 보기 마련.
우리 집안에서 가문 히어로로 평가받는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막내 삼촌과 고종사촌 형.
성실함과 겸손함을 기반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쌓고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서 노력으로 가문의 지휘를 높였다고 평가받는
'흐름안의 최고 적응자'....
(현재 막내삼촌은 치과의사이고, 작은형은 한의사이다.)
그들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가족들이 그들에게 표하는 존경, 경외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면서
나는 스스로의 롤 모델을 그 인물에 맞추고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주변 친척들 역시 내가 그 뒤를 이을 '훌륭한 인물'이 되길 바랬고
나는 주변을 실망시키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삼촌과 형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가장 큰 두가지 차이점은,
첫째로 나에게는 친척들은 아무도 가지지 않았던 '꿈'이 있었고,
둘재로 내가 '수더분한 삶'을 이루기엔 저항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여러 환경적인 요인 속에서
막내삼촌과 작은형이 '꿈'자체를 꿀 수 없었던 상황의 피해자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과 닮아가기 위해 포기해야했던 기회비용은
그들에게는 애초에 헤아릴 수 없는 변수였으며,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내가 꿈을 이루길 바라는 단 두 사람이었지만,
역시 가문의 기대와 배치되는 수준의 꿈은 포기하길 권유할 뿐이었다.
우울과 인내, 뒤틀린 영혼의 분노로 채워진 학창시절도 끝은 있었다.
결국 내가 내게 주어진 모든 무게를 던져버리고
홀가분히 나의 하늘을 날아본 날은
가족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으로 멀어진
지난 몇년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억눌린 에너지는 강했으며
그 에너지의 분출은 내 스스로가 보기에도
화려했으며 아름다웠다.
결국 '죽음'을 대체할 '분출'이 한차례 이루어지고
나는 예전보다는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선택을 마주하고 있다.
그 강철문은 10년동안이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있어
마치 늘 무표정한 생물체마냥 소름끼치고 압도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을지도 모를 문이다.
내 성격과 습관,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는 착한아이 컴플렉스...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된 '기대'라는 무서운 단어.
내게는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과의 동의어.
그 문을 열면 나는 아버지가 되고,
문을 여는 대신 날아오르면 나는 결국 내가 된다.
그 문을 열면 내가 잘 아는 익숙한 길이 펼쳐지고,
날아오르면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을 불안정한 허공이 있다.
압도할 수 없는 절대자를 눈앞에 마주한 느낌으로 손잡이를 잡았지만
나는 짐짓 익숙해진 내 날개를 천천히 움직여본다.
그 땐, 선택이 쉬웠지만 행동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 자체가 어렵다.
분노의 대상이었던 부모님은 연민이라는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고,
10년이란 세월은 나의 어디를 무디게 했는지
문을 여는 것도 아예 답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지켜야할 존재는 어찌 되었든 '타협'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철문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채
날개를 펴고있다.
꿈과 기대...
미련과 자책...
어찌 되었든 피할 수 없는 후회...
이미 한참 늦었지만,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뭐가 더 맞는건지.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이란 사회에서
나는 선천적으로
꽤나 서양식 사고방식을 타고났다.
일단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영어를 '이해'했으며
기하학과 물리에 강하고
내 주변과의 접점에서 느껴지는 사회적 스트레스에 매우 약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들어가는 우리 집에서는
내가 기형아에 가까울 정도로 반집단적인 사고를 보이고
모든 기대에 부단히 부응해가는 모범생 형에 비해서 항상 이슈화된 문제아였다.
외압에 민감한 사람은 항상 눈치를 보기 마련.
우리 집안에서 가문 히어로로 평가받는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막내 삼촌과 고종사촌 형.
성실함과 겸손함을 기반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쌓고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서 노력으로 가문의 지휘를 높였다고 평가받는
'흐름안의 최고 적응자'....
(현재 막내삼촌은 치과의사이고, 작은형은 한의사이다.)
그들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가족들이 그들에게 표하는 존경, 경외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면서
나는 스스로의 롤 모델을 그 인물에 맞추고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주변 친척들 역시 내가 그 뒤를 이을 '훌륭한 인물'이 되길 바랬고
나는 주변을 실망시키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삼촌과 형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가장 큰 두가지 차이점은,
첫째로 나에게는 친척들은 아무도 가지지 않았던 '꿈'이 있었고,
둘재로 내가 '수더분한 삶'을 이루기엔 저항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여러 환경적인 요인 속에서
막내삼촌과 작은형이 '꿈'자체를 꿀 수 없었던 상황의 피해자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과 닮아가기 위해 포기해야했던 기회비용은
그들에게는 애초에 헤아릴 수 없는 변수였으며,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내가 꿈을 이루길 바라는 단 두 사람이었지만,
역시 가문의 기대와 배치되는 수준의 꿈은 포기하길 권유할 뿐이었다.
우울과 인내, 뒤틀린 영혼의 분노로 채워진 학창시절도 끝은 있었다.
결국 내가 내게 주어진 모든 무게를 던져버리고
홀가분히 나의 하늘을 날아본 날은
가족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으로 멀어진
지난 몇년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억눌린 에너지는 강했으며
그 에너지의 분출은 내 스스로가 보기에도
화려했으며 아름다웠다.
결국 '죽음'을 대체할 '분출'이 한차례 이루어지고
나는 예전보다는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선택을 마주하고 있다.
그 강철문은 10년동안이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있어
마치 늘 무표정한 생물체마냥 소름끼치고 압도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을지도 모를 문이다.
내 성격과 습관,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는 착한아이 컴플렉스...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된 '기대'라는 무서운 단어.
내게는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과의 동의어.
그 문을 열면 나는 아버지가 되고,
문을 여는 대신 날아오르면 나는 결국 내가 된다.
그 문을 열면 내가 잘 아는 익숙한 길이 펼쳐지고,
날아오르면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을 불안정한 허공이 있다.
압도할 수 없는 절대자를 눈앞에 마주한 느낌으로 손잡이를 잡았지만
나는 짐짓 익숙해진 내 날개를 천천히 움직여본다.
그 땐, 선택이 쉬웠지만 행동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 자체가 어렵다.
분노의 대상이었던 부모님은 연민이라는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고,
10년이란 세월은 나의 어디를 무디게 했는지
문을 여는 것도 아예 답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지켜야할 존재는 어찌 되었든 '타협'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철문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채
날개를 펴고있다.
꿈과 기대...
미련과 자책...
어찌 되었든 피할 수 없는 후회...
이미 한참 늦었지만,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뭐가 더 맞는건지.
사고 #2
How does it comes to this?
1.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패턴...
이 의식의 근본은
"모든 상황은 통제 가능하고 미래는 예측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주로 미국과 유럽 서부의 라틴어계열 문화권에서 강하게 드러나며
유럽중에서도 서부로 갈 수록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실험의 결과는 말하고 있다.
그 것은 그 지방의 사람들이 영아, 유아를 교육하는 사고방식이며
그 사고방식이 그에 적합하게 라틴어에 영향을 미친 후
또 다시 라틴어 자체가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형식으로
세대를 거듭할 수록 강해진다.
"Categorizm"으로 발전하는 이 사고방식은
그 정수로 기하학, 수학, 공학등이 세상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라는 분류 자체가 이 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주변에 통제 가능성에 대해 뿌리를 두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가지로 "주변을 바꾸는"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는 성향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캐릭터는
"주변 통제적"인 성향도 같이 띄기 쉽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권장했던 '논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한 상황 논리를 피하고
지적 일관성을 기르게끔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의 흐름은 인류의 발전을 '직선적'으로 해석하며
따라서 '유토피아'는 미래에 있다.
아는 것이 힘이며
더 많은 부분을 알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좀 더 많은 상황을 '예측가능한'범주 아래에 두는 것이 우월하게 여겨진다.
사람을 어떤 범주로 나눔에 있어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물론 개인에 따른 차이가 있고 특수한 경우까지 다 아우를 수는 없지만,
실험값의 결과가 지역에 의존해 평균값이 유효하게 차이가 남으로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부르기로 한다.
2. "맞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알수없다"패턴...
이 사고방식은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철학에서 기인한다.
중국을 중심으로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강하게 나타나며
특별히 동양3국(중국, 일본, 한국)에서
비슷하지만 개별적으로는 독특한 형태로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맞는 대전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인 힘을 연역보다는 귀납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중국 고대 천문점성술의 경우
어떤 보이지 않고 통제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천체 별자리의 움직임이 왕조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그리고 Input과 Output의 관계를 찾아내는데 상당한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물론, 과정은 설명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설명할 생각이 없다)
모든 것은 개체의 혼자서가 아닌
큰 흐름의 일환으로 존재하기에
어떤 객체의 속성을 파악하기 보다는
주변과의 관계로 대상을 정의한다.
(반지 = 손에 끼는 물건 : Ring = 동그랗고 속이 비어있는 형태의 원)
인간은 자연과 따로 구분되지 않으며
(애초에 범주화라는 말이 없고, 자연스레 기하학은 발달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온통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미덕을 '자연스러움'과 '적응'에 둔다.
이 사고방식은 '예의범절'과 '도'의 형태로 발달하며
가장 주변과 마찰이 없는 형태를 미덕으로 여긴다.
늘 주변에 대해 '평범하기'를 권장하고
집단의 일원으로서 가해지는 스트레스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둔감하다.
특별히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후견지명적'성향,
즉 '내 그럴줄 알았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항상 결론이 열려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사건 이전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후에는 결국 결론에 가까웠던 사고방식에 쉽게 고착한다.
(결국 결과가 그렇게 될 줄 알고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효가 권장했던 '화쟁'사상은
항상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흡수하고 예측의 영역을 넓히는데 목적이 있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다른 상황에서도 누가 옳으면 누가 그르다는 판단은 배제되며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할 수 있어 변화에 더 자연스럽게 대처하기위함이 목적이다.
경험이 많고 대처가 능숙한 연장자가 사회의 권위자가 되며
교육은 주로 그들로부터 미숙한 청년에게로의 '주입'의 형태를 띈다.
자연스럽게 이미 정해진 과거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비해 안정적이고 확정적이며
지나간 시간의 미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곁들여져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항상 '과거'에 존재한다.
가장 평범한 것은 주변과 확실히 동화되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며
질서와 관례를 흩뜨리지 않는,
주변과 잘 동화된 상태를 이상향으로 여긴다.
이런 성향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서양식 사고방식에 대비해 '동양식 사고방식'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한다.
(사고 #3은 이따가 밤에...)
1.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패턴...
이 의식의 근본은
"모든 상황은 통제 가능하고 미래는 예측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주로 미국과 유럽 서부의 라틴어계열 문화권에서 강하게 드러나며
유럽중에서도 서부로 갈 수록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실험의 결과는 말하고 있다.
그 것은 그 지방의 사람들이 영아, 유아를 교육하는 사고방식이며
그 사고방식이 그에 적합하게 라틴어에 영향을 미친 후
또 다시 라틴어 자체가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형식으로
세대를 거듭할 수록 강해진다.
"Categorizm"으로 발전하는 이 사고방식은
그 정수로 기하학, 수학, 공학등이 세상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라는 분류 자체가 이 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주변에 통제 가능성에 대해 뿌리를 두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가지로 "주변을 바꾸는"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는 성향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캐릭터는
"주변 통제적"인 성향도 같이 띄기 쉽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권장했던 '논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한 상황 논리를 피하고
지적 일관성을 기르게끔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의 흐름은 인류의 발전을 '직선적'으로 해석하며
따라서 '유토피아'는 미래에 있다.
아는 것이 힘이며
더 많은 부분을 알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좀 더 많은 상황을 '예측가능한'범주 아래에 두는 것이 우월하게 여겨진다.
사람을 어떤 범주로 나눔에 있어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물론 개인에 따른 차이가 있고 특수한 경우까지 다 아우를 수는 없지만,
실험값의 결과가 지역에 의존해 평균값이 유효하게 차이가 남으로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부르기로 한다.
2. "맞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알수없다"패턴...
이 사고방식은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철학에서 기인한다.
중국을 중심으로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강하게 나타나며
특별히 동양3국(중국, 일본, 한국)에서
비슷하지만 개별적으로는 독특한 형태로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맞는 대전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인 힘을 연역보다는 귀납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중국 고대 천문점성술의 경우
어떤 보이지 않고 통제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천체 별자리의 움직임이 왕조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그리고 Input과 Output의 관계를 찾아내는데 상당한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물론, 과정은 설명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설명할 생각이 없다)
모든 것은 개체의 혼자서가 아닌
큰 흐름의 일환으로 존재하기에
어떤 객체의 속성을 파악하기 보다는
주변과의 관계로 대상을 정의한다.
(반지 = 손에 끼는 물건 : Ring = 동그랗고 속이 비어있는 형태의 원)
인간은 자연과 따로 구분되지 않으며
(애초에 범주화라는 말이 없고, 자연스레 기하학은 발달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온통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미덕을 '자연스러움'과 '적응'에 둔다.
이 사고방식은 '예의범절'과 '도'의 형태로 발달하며
가장 주변과 마찰이 없는 형태를 미덕으로 여긴다.
늘 주변에 대해 '평범하기'를 권장하고
집단의 일원으로서 가해지는 스트레스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둔감하다.
특별히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후견지명적'성향,
즉 '내 그럴줄 알았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항상 결론이 열려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사건 이전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후에는 결국 결론에 가까웠던 사고방식에 쉽게 고착한다.
(결국 결과가 그렇게 될 줄 알고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효가 권장했던 '화쟁'사상은
항상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흡수하고 예측의 영역을 넓히는데 목적이 있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다른 상황에서도 누가 옳으면 누가 그르다는 판단은 배제되며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할 수 있어 변화에 더 자연스럽게 대처하기위함이 목적이다.
경험이 많고 대처가 능숙한 연장자가 사회의 권위자가 되며
교육은 주로 그들로부터 미숙한 청년에게로의 '주입'의 형태를 띈다.
자연스럽게 이미 정해진 과거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비해 안정적이고 확정적이며
지나간 시간의 미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곁들여져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항상 '과거'에 존재한다.
가장 평범한 것은 주변과 확실히 동화되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며
질서와 관례를 흩뜨리지 않는,
주변과 잘 동화된 상태를 이상향으로 여긴다.
이런 성향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서양식 사고방식에 대비해 '동양식 사고방식'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한다.
(사고 #3은 이따가 밤에...)
2010년 8월 2일 월요일
사고
국가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경우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법정기관은
크게 두가지 방침중 하나를 택한다.
하나는 '무죄라고 판결되기 전까지는 유죄'인 시스템이고,
나머지는 반대로 '유죄라고 결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인 시스템이다.
사고방식의 분류도 이와 비슷하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고 간주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맞다고 간주되기 전까지는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은 분명 상대적이고 장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쪽이 좀 더 '일관적'이고
후자쪽은 좀 더 '안정적'이다.
또 한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반대로 바라보기에
전자쪽은 '오만하다'고 보이기 쉬우며
후자쪽은 '후견지명적'으로 느껴진다.
개개인의 삶을 잘 관찰해보면
그 사람이 둘 중 어느 사고방식을 따르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는
전자부류의 인물이 '틀렸다'고 확신하는 사실과
후자의 부류가 '맞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정기관은
크게 두가지 방침중 하나를 택한다.
하나는 '무죄라고 판결되기 전까지는 유죄'인 시스템이고,
나머지는 반대로 '유죄라고 결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인 시스템이다.
사고방식의 분류도 이와 비슷하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틀리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맞다'고 간주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맞다고 간주되기 전까지는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은 분명 상대적이고 장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쪽이 좀 더 '일관적'이고
후자쪽은 좀 더 '안정적'이다.
또 한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반대로 바라보기에
전자쪽은 '오만하다'고 보이기 쉬우며
후자쪽은 '후견지명적'으로 느껴진다.
개개인의 삶을 잘 관찰해보면
그 사람이 둘 중 어느 사고방식을 따르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는
전자부류의 인물이 '틀렸다'고 확신하는 사실과
후자의 부류가 '맞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드 구독하기:
덧글 (Atom)